필자는 오랜 세월 아주신씨시조바로세우기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화해사전에 의한 기묘보(안동파) 족보사기극이 제작 시부터 의성의 읍·귀 양파에서 반대하며 200여 년간 종친간의 갈등과 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평산신씨에도아무것도 없으며, 관계가 없다고 수차례 공문을 보내왔다. 전고대방, 문헌비고, 일제 시 성씨총감 등 국가에서 편찬한 모든 문서와 의성의고문서에도 아주신씨의 시조는 아주현의 권지호장 신영미라고 되어 있다. 우리만의 독자적인 상계를 가지고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고, 또 우리 아주신씨를 평산신씨의 분파로 보는 화해사전이란 책이 위서라는 사실을국사편찬위원회는 물론 사학계에서도 널리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종회의 몇몇 사람들이 화해사전의 내용에 따라 우리 아주신씨를 평산신씨의 분파로고집하고 있어 자손된 도리로서 부끄럽고 이 사태를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뜻을 같이하는종인들과 함께 아주신씨시조바로세우기협의회를 2005년 3월발족하여 관련 사적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아주신씨 역사』를 상재한 바 있다. 1600년대 회당, 호계, 만오, 난재, 응암, 오봉, 회병, 도와공께서 삼남의 명문거족으로 세우셨으며 고려(우자)·조선(회당공) 양조에걸쳐 효의 가문으로 정려문을 제수 받아 종친간에 화기애애한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중에 느닷없이 1819년기묘보(안동파) 제작시 화해사전과 족보 사기꾼 김노정에 의한평산신씨 11대 연(1200년대)의 아들 고령신씨 숙(1100년대)으로아들이 100년 전에 출생도 하고, 기묘보는 아버지로, 오늘의 족보는 형제로 되어 있다. 어떻게 아들이 100년 전에 출생하고, 기묘보는 아버지로 이번의 족보는 형제가 될수 있나? 이것은 완벽한 족보사기극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가만든 왜곡 조작한 역사에 헤어나지 못하고 족친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지는 우를 오늘도 범하고 있으며 모든 역사 오류를 바로 세워야할 대종회가 1600년대, 가문의 융성기와1800년대, 조작된 암흑기에 있어 선대의 뜻 있는 행적을 구분도 못하는 무지와 억지만으로평산신씨에서 분관이라며 일관하고 있다. 1600년대 훌륭한 선대의 뜻은 따르지 않고 암흑기의 화해사전에의한 왜곡조작된 선대의 가짜족보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어느 누가 봐도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다. 아주신씨 영모록은 난재공과 인연으로 발간되었다. 당대 훌륭한 학사김응조공의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훌륭한 아주신씨가문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만든보서를 번역출판함이 아주신씨 시조의 뜻 있는 확증의 일면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의 역사적 오류를묵과하드라도 지금 최첨단의 시대에는 어떤 연유에서든 200년간의 족보사기극은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한다. 모든 것은 역사적 진실 앞에 사실대로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내려가야 한다. 오늘의 후손된 도리로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선현의 고매하신 뜻과 진실에 대한 충직한 정의감을 따르지못하고 있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은 끝없는 속죄의 늪에 빠졌다. 오직 진실만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 책 『신씨영모록(申氏永慕錄)』은 1587(선조 20)∼1667(현종 8)에 활동하였던 김응조(金應祖)라는사람이 거제도 아주(鵝洲)를 본관으로 하는 신씨 집안 인물들의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신씨 가문의 인사가 아닌 김응조가 신씨 가문의 주요 인사들의 업적을 오래도록잊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찬자가 된 것은 난재(懶齋) 신열도(申悅道)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신열도와김응조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였고,모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손녀사위들이다.
이 영모록은 그 앞머리에서 [아주신씨세계(鵝洲申氏世系)]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아주 신씨 집안은 고려시대 거제도 아주의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가 시조이며, 본관은거제도 아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유(允濡)의 일화와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 우(祐), 내부령 광부(光富), 조선시대 언양현감(彦陽縣監) 사렴(士廉), 생원 석명(錫命), 승사랑(承仕郞) 준정(俊禎), 처사(處士) 수(壽), 참의 원록(元祿), 승지 흘(仡), 찰방 적도(適道), 장령달도(達道), 장령 열도(悅道) 등의 행록을 소개하고 있다. 17세에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고 이후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인조 즉위 직후 문과에 급제한 김응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반열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김응조가 자신의 책에서 아주신씨의 시조를 신영미(申英美)로 파악한 것은 보학을 지식인의 핵심적인 교양으로 다루었던 16-17세기지식인 사회에서는 신영미(申英美)를 시조로 하는 아주신씨세계가보편적인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필자가 이 책의 간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것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아주신씨의 시조를 다시 한 번 바로세우기 위한 염원에서이다. 이 책의 우리말번역에는 인천대학교 강석화 교수께서 수고해 주셨다. 강 교수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오랜 세월 조선시대정치사를 연구해온 저명한 학자이다. 영모록의 번역과 주석 작업을 수행해 주신데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자한다. 이 책 말미에는 경북대학교 사학과 전현수 교수가 쓴 아주신씨 족보 문제에 대한 소논문이 실려있다. 이 글은 우리 시대 역사학계의 주요 학자들이 아주신씨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 단편을보여준다고 하겠다.